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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하는 생각

20.04.02 변비같은 생각들

- 한동안 디지털 드로잉을 열심히 했습니다. 일이 적어 한동안 집에 있게 되어 답답한 차에 잘됐다 싶어 밥먹고 아가와 놀아주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특별히 준비할 것도 없이 언제든 전원만 켜면 그림을 그릴 수 있고, 색을 바꾸는 과정도 간단해서 오랜만에 집중력있게 드로잉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디지털 펜과 액정 화면이 닿는 궁합이라는 것이 그리 좋은 느낌이 아닙니다. 종이에 연필로 그릴 때, 또는 종이에 붓을 댈 때, 캔버스에 붓을 댈 때는 표면의 질감과 매개의 질감을 손끝에서부터 느끼며 강약이라든지 각도를 조절하게 되는데 디지털은 오직 단단한 액정과 펜촉의 부딪침 뿐입니다. 가격이 있는 종이에 그림을 그릴 때면 손목에 돌아오는 감각이 아주 만족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여러가지 환경적인 요소들이 결과물에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디지털 패드에는 각도라든지 필압같은 것들이 입력될 때 손목에 오는 반응은 말 그대로 말귀를 못알아먹는 물건에다가 대고 일장 연설을 하는 느낌입니다. 이 기계를 가지고 간단히 일정관리를 한다든가 기호 정도를 그리는 것이라면 별로 상관이 없었을 것 같지만, 간간히 세밀한 묘사를 필요로 하는 그림을 종일 몰두해서 그리고있다가 보니 손목에서부터 팔꿈치까지가 슬슬 저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저린다는 느낌이 근육에서가 아니고 근육들 사이에 있는 신경에서 느껴지는 것이라 아주 불쾌했습니다. 처음엔 카페인 때문인지 운동부족인 탓인지 여러 생각이 들어 즐기던 음료들도 전부 끊었는데, 이내 종일 붙잡고있는 패드와 펜 때문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병원에 가니 목디스크를 의심했지만, 사진을 찍어보니 목에는 별 문제가 없었습니다. 한동안 손을 사용하지 말라는 판결문을 받고, 시간이 남으면 책을 보거나 글을 적거나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멍하니 있었습니다. 디지털 드로잉은 이제 펜을 집어드는 상상만으로 팔이 저려옵니다. 앞으로 다시 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 당분간이긴 하지만 책임질 가족이 있는 한창 젊은 남자 어른이 집에 들어앉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앉아있으려니, 특히 강제 휴가기간동안 이거라도 몰두하면 되겠다 싶었던 일(그림, 운동)마저 부상으로 금지당하고나니 별의별 생각들이 몸과 마음을 갉아먹었습니다. 살아가는 일에 대해 참 많은 생각이 찌꺼기처럼 쌓여 생각을 줄이기 위해 노력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건전하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답없는 생각에 잠기는 것은 좀처럼 단칼에 잘라내기 힘든 무언가가 있습니다. 비루한 나의 삶을 이 각도에서 보고 저 각도에서 바라봐도 의미가 없다고 느껴질 때에는 내 모든 생의 억울함이 분노가 되어 삶의 희노애락을 태워버려 한 줌의 재만 남긴 채 지쳐 자리에 눕습니다. 이 놈 저 놈 기분 좋을 때 예수님 이름 빌려 너그러이 용서해주었던 놈들을 끄집어내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상상을 하면서 잠이 듭니다.

 월급을 받는 생활에 안정된 집과 차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도 있습니다. 몇년 전만 해도 이 조건은 저에게 더 바랄 것도 없는 완벽한 환경이었지만, 정말 이상하게도 지금은 더 큰 욕심이 생깁니다. 지금보다 더 안정적으로 더 많은 것을 갖고싶습니다. 삶이 허무해지고 답답합니다. "아, 이게 다구나! 더 가지려 발버둥치다가 사그러들겠구나!" 라는 무책임한 생각을 꾸짖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봅니다.

 그림을 그리는 일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봅니다. 하여튼 고등학교때부터 한 장이라도 더 그리고 만들 시간에 항상 생각을 하다가 한발자국씩 뒤쳐져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도 이왕 시간과 정성을 들여 생각한 김에 적어두려 합니다. 왜 굳이 아직도 작가를 하려고 하는가, 아무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아도 나는 작업을 하고 있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답해야할 문제라기보다 거의 맞서 싸워야할 질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순간부터 삶에 집중하다보니, 아무도 내가 작업하는 것에 관심도 없고 작업하는 것을 원하지도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저 자기만족일 뿐이라면 확실하게 계속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세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그밖에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 그게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기만족은 당연한 것인데, 분명 그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계속 해보려고 합니다. 언젠가 어느 쪽으로든 확신이 생기리라 생각합니다.